crossorigin="anonymous">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 crossorigin="anonymous">-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아무도 없는 곳 - 멀어진 거리, 말 없는 위로, 다시 걷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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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별 영화 큐레이션

아무도 없는 곳 - 멀어진 거리, 말 없는 위로, 다시 걷는 하루

by flavorflux 2025. 5. 12.

홍의정 감독의 《아무도 없는 곳》은 이야기보다 관계에 머무는 영화다. 이선균이 연기한 장석은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잠시 한국에 머무는 소설가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왜 한국에 왔는지, 무슨 이유로 사람들을 만나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인천의 오래된 카페, 낯선 거리, 익숙한 듯 먼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묻고 답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말없이 앉아 있고, 가끔 술을 마시고, 짧은 인사를 나눈다.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균열을 만든다. 장석은 예전 친구를 만나고, 몇몇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나누는 말은 길지 않고, 어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반응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거리를 확인해 간다. 익숙하지만 이미 멀어진 관계, 낯설지만 어딘가 닮은 사람들. 영화는 그런 관계들 사이에서 말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조용히 말한다.

카메라는 늘 약간 거리를 두고 인물을 바라본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감정을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관객은 인물의 눈빛이나 말투보다는 그들이 머무는 공간, 앉은 자세, 말을 하지 않는 시간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장석이 누구인지보다,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곳》은 질문을 하지 않지만, 대답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감정. 그걸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멀어진 거리

장석은 돌아왔지만, 그가 돌아온 곳은 단순히 한국이 아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 익숙했던 장소,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시절. 그는 인천에 있는 한 카페를 중심으로 머문다. 그곳에서 오랜 친구와 만나고, 예전에 알았던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만남들은 반갑기보다 어색하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건네는 말은 공손하지만 어느 순간 멈춘다.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 만든 거리감이 있다.

영화는 그 거리를 시각적으로도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멀리서 잡고, 대화 중에도 두 사람 사이에 공간을 남긴다. 어떤 인물은 소파에 기대고, 다른 인물은 벽에 등을 기댄다. 그 거리만큼 감정도 닿지 않는다. 말이 오가지만, 마음이 오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더 이상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그런 관계들이 있다. 아주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이 멀어진 사이. 그 사이는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느낌이 든다. 장석이 느끼는 거리감은 외로움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누구와도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체념에 가깝다. 영화는 그 감정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장면마다 조용히 묻어나게 만든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리. 우리는 때때로 서로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 출처: Pixabay@Bananayota

말 없는 위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들이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화는 짧고, 감탄사나 무심한 리액션으로 끝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대화들이 마음에 남는다. 장석은 처음 보는 청년과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카페 사장과 예전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한 주제는 없고, 이야기의 방향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대화들 안에서 조용한 위로가 만들어진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건, 꼭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말로 옮기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장석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조용한 이해가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서로의 인생에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시간을 나눈다.

어떤 감정은 말로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희미해질 때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감정을 믿는다. 직접적인 설명이나 눈물보다, 조용한 머뭇거림과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장석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말하지 않지만, 그는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머문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감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진짜였다.

다시 걷는 하루

장석은 영화 내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뭔가를 결심하거나, 어디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서 우리는 그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다. 표정이 바뀌고, 걸음이 다르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화해하거나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조용한 시간들이 그를 조금 바꿔놓은 것이다.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큰 결심이나 변화 없이, 하루하루 조금씩 변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은 바로 그 ‘조금’의 감정에 집중한다. 우리가 늘 지나치는 사람들, 짧게 나누는 말들, 잠깐 머무는 장소들이 때로는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장석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평범하다. 그는 길을 걷는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고, 특별한 감정도 없다. 하지만 그 걸음엔 이전보다 덜 무거운 마음이 실려 있다. 영화는 그걸 조용히 지켜본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채는 방식으로 영화는 끝난다.

“불빛은 흐리고 말은 없었지만, 그 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 출처: Pixabay@Pexels

 

《아무도 없는 곳》은 말이 적지만 감정은 깊은 영화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삶의 한 조각을 보여주며, 누군가의 하루에 잠시 머무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조용히 다가와 오래 남는 작품이다.